자본주의 이전
ㅁ 영국에 있어서 최초의 빈민구호는 벌족(clan)조직이라는 원시적인 혈연조직에 의한 것.
ㅁ 이 벌족조직은 중세봉건사회의 길드라는 상호부조체제에 의해 공고화
ㅁ 이후 그 성격은 교회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나 → 15세기 종교혁명과 강력한 중앙정부로서의 튜더왕조(1485 ~1603) 등장 → 상부상조적 전통체제 중요성 약화.
ㅁ 이 시기에는 봉건적 생산관계가 농민을 토지에 매이게 하였다. 즉, 국민은 신분적·직업적·지리적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자연적 혹은 우연적 사고가 있을 경우에는 가족과 이웃의 상호부조적 구제에 흡수되거나 지배계급의 자선적·자혜적 구제가 그것에 대응했기 때문에, 근대적 의미의 사회복지는 형성되지 않았다. |
(구)구빈법 시기(1601~ 1834)
1. 엘리자베스 구빈법(1601)
ㅁ 사회복지발달의 제 1시기로 자본주의 발달의 원시적 축적기에 해당한다.
ㅁ 이 법은 향후 300년 이상 계속하여 영국과 다른 국가에 까지 대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 구빈법의 등장배경
ㅁ 과거, 자선과 자조행위에 의존했던 원시형태의 빈곤구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국가의 개입을 필연적으로 요구 → 그러한 변화의 불가피성은 중세 봉건제의 붕괴 + 초기 자본주의의 맹아(새싹)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와 함께, 빈민, 부랑인의 수적 증가 및 그로 인한 사회문제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ㅁ 이 당시 국가는 이들 노동능력이 있는 건강한 빈민들은 사회를 혼란시키는 범죄자 혹은 국부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간주하였으므로 국가는 이들에 대해 법적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ㅁ 따라서 1349년 부랑자에 대한 최초의 법적대응인 자선금지법(1349)을 출발로 일련의 구빈정책을 거쳐 마침내 등장하게 된 것이 1601년,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다. |
2) 개요
ㅁ 목적: 빈민구제, 취로의 강제(노동/일), 부랑자 정리
ㅁ 재원: 구빈세 징수(교구 내 거주자들 소득의 10분의 1 납부)
ㅁ 빈민구분과 그 대책: 노동능력의 유무에 따른 차별적 빈민 구제
○ 노동능력자: 작업장 배치, 노동에 전념토록 구제 ○ 노동무능력자: 구빈원 수용, 원내구제, 시설보호, 현물급여지급 -> 최소한의 구제 ○ 빈곤 아동(요보호아동): 가정위탁/ 도제(가르치는 것) |
3) 특징
ㅁ 세계 최초로 구빈책임을 규정한 법률, 빈민구제 = 지방정부의 책임으로 인식
ㅁ 구호대상자의 신청요건: 해당 교구의 3년 이상 거주자만 부여
ㅁ 영국 구빈법의 기본토대이자 공공부조의 시초
ㅁ 실질적 운영을 위한 국가의 재원 조달을 규정하고 구빈세를 부과
ㅁ 개인적 빈곤관에 입각한 소극적 국가 개입, ' 선 가정 후 사회복지'라는 원칙 하에 국가가 통제하는 입장에서 공공부조가 이루어짐
ㅁ 즉, 친족의 부양 책임을 강조, 행려걸식 방지에 주력
ㅁ 작업장과 구빈원을 활용하여 작업장 제도와 시설보호를 정착
2. 정주법(1662), 작업장법(1722), 길버트법(1782), 스피핸램드법(1795)
1) 정주법(1662) - 빈민의 거주 이전 자유 박탈
ㅁ 빈민들이 부유한 교구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ㅁ 즉, 교구내 법적 거주권 소지자에 한해 구빈을 규정하였기 때문에, 부랑인들은 자신과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강제 이동 및 거주할 수 밖에 없게 하였다.
ㅁ 거주 이전의 자유 박탈을 통해 산업화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ㅁ 다만, 노동자 이동이 제한됨으로써 실업 및 요구호자의 수적 증대를 초래하였다.
2) 작업장법(1722) - 원내구제
ㅁ 이는 국가의 부조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업장에 입소하여 구제 등록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는 원내구제 원칙을 정착시켰다.
ㅁ 노동이 가능한 빈민을 고용하여, 국부의 증진을 기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ㅁ 즉, 국가의 이윤추구를 위한 빈민구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ㅁ 상습적인 걸인/ 난폭한 부랑아를 연합구의 공동작업장에 종사토록 하였다.
ㅁ 걸인이나 부랑자수는 감소하였으나 작업장 안에서 빈민들에 대한 처우는 비인간적이었으며, 후에는 지하감옥으로 불리게 되었다.
작업장의 빈민의 비참한 생활과 착취를 개선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최초로 원외구제를 인정한 길버트법(1782) 이다.
↓
3) 길버트법(1782) - (최초의) " 원외구제 " ," 작업장법 폐지 "
ㅁ 구빈법의 행정적 집행 개선 및 인도주의적 규제를 도입하기 위해 제정된 법
ㅁ 즉, 작업장에서 빈민의 비참한 생활과 착취를 개선할 목적으로 제정
ㅁ 작업장의 인도주의화를 도모하여 일괄 청부제도를 폐지함.
① 원외구호(원외구제): 근로능력자라도 작업장에서 작업하지 않고 직업을 얻을 때 까지 자신의 집에 거주하면서 구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함.(즉, 거택보호 인정) | ||
② [여러 교구의 연합체 형성] ↓ 교구 간 [공동 구빈세의 징수와 지출] + [합동으로 구빈원을 설립] ↓ [근로능력이 없는 빈민들을 구제] 할 수 있게 함. |
4) 스피핸램드법(1795) - 임금보조제 도입, 근로능력 x 빈민의 최저생활 보장
ㅁ 길버트법에서 발전한 것으로 한 가정의 생계에 드는 음식물비를 기준으로 하여 책정한 임금보조제를 도입하여 빈민들에게 최저생계비를 보장해주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ㅁ 즉, 근로능력이 없는 빈민층에게 최저한 생활을 보장해주고, 최저소득에 못 미치는 근로자들에게는 부족한 부분을 정부가 보충해주는 법이다.
ㅁ 빈민대책에 가족 수를 고려한 최초의 법령(가족수 x 빵값), * 종가임금제도로 운영
* 종가임금제도: 물가나 생계비 지수의 변동(變動)에 따라, 임금이나 배당을 올리고 내려서 실질 임금의 안정을 꾀하는 방식. |
ㅁ 이 법을 통해 원외구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 결과
① 인구가 증가되면서, 그로 인한 구빈세도 많이 거두게 되었다. ② 사용자들의 지속적 임금 저하로 빈곤 제거보다는 오히려 제도에 빈민을 의존하게 만들었다.(즉, 사용자에게 적절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닌 국가의 원조를 더 선호하게 됨) ③ 인구의 증가, 빈민의 의존심과 독립심 저하는 결국, 시민의 구빈세 부담을 늘게 하였고, 임금의 현저한 감소를 초래했다. ④ 또한, 구빈비용 증가로 인한 국가의 부담까지 증가하였다. ⑤ 이는 결국 구빈세 납세자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신구빈법의 탄생 배경을 형성토록 했다. |
결국, 국가의 지나친 부담과 납세자들의 반발에 한계에 봉착한 초기의 구빈법을 보완하여 새롭게 개정된 구빈법(1834)이 왕립위원회의 보고에 의해 등장하게 된다.
↓
개정 구빈법(1834)의 시기
- 노동능력자 원외구제 중지, 열등처우, 균등처우, 작업장법 부활
ㅁ 기존의 구빈법을 1832년 발족된 왕립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개정하였다. 그 후 1834년 Senior의 왕실위원회 보고에 의해 개정구빈법을 실현하게 되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노동능력자에 대한 원외구제 중지 -> 노동가능자는 작업장에 배치(작업장법 부활) - 노동무능력자에 대한 예외적인 원외구제 허용 ② 열등처우의 원칙: 정상적 노동을 권장하기 위해 구제의 수준을 극빈 독립노동자의 생활수준보다 낮은 수준에 두는 것( 즉, 노동을 유도하기 위해 극빈 독립노동자의 임금 수준보다 낮은 처우를 제공함- 기존의 의존적 노동능력자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일할 수 밖에 없게 됨) ③ 작업장 입소자격조사: 빈곤처우의 지나친 다양성과 자격조사에 따른 부패를 해소하기 위한 단순조사, 이를 통해 구제적용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배제함. ④ 스핀햄랜드법의 임금보조제 폐지 ⑤ 균일처우의 원칙 - 모든 빈민은 생활상황에 관계없이 동등한 처우를 받는다 - 구빈법의 운영 효율성을 위해 만든 원칙으로, 빈민의 처우를 전국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구빈정책을 지도하고 각종 교칙의 실시를 감독할 중앙통제기관을 둔다. ( 구빈행정을 통제할 중앙기구로서 중앙통제위원회 설립) |
ㅁ 목적은 국가의 구빈비용 절감이었다.
ㅁ 개인적 빈곤관의 입장에서 빈민에게 낙인을 주는 등의 비인도주의적 처우를 당연시 하였고, 시혜적 성격을 띠었다.
ㅁ 즉, 인도주의를 배격하고, '억압 속의 구제' 라는 구법원칙을 복귀시켰다.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운동의 등장
-이 부분은 사회복지실천론, 지역사회복지론을 통해 자주접한 부분이기 때문에
사회복지실천론 서구 사회복지역사 부분에서 정리한 내용을 가져왔다.
1. 1869년, 영국ㅣ 자선조직협회(COS) 등장
☞ COS 등장 배경
: 19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 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자선단체가 등장하였다. : 이들의 활동에 빈민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중복 구제, 구제 누락 등의 문제 또한 문제시 되어 무질서한 자선단체의 구호를 개선하고, 서비스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증진하기 위해 1869년 영국 런던에서 최초의 자선조직협회가 설립되었고, 1877년 미국뉴욕 버팔로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선조직협회를 설립하였다. |
☞ 기능
- 구제 중복/ 누락 배제 - 효율적 구제활동전개 위한 구제등록 실시 - 여러 구제기관 간의 연계 및 조정 등을 실시(즉, 자선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 |
☞ 개요
- 우애방문을 원칙으로 하지만, - 빈곤을 개인문제로 보고 - 빈곤문제를 사회적 구조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경시 - 호별방문 도입을 통해 엄격한 자산조사를 실시하여, 빈민에 대한 낙인 형성토록 함. - 빈민과의 친밀한 관계형성 보다는 사회통제적 성격이 강하여, 자격이 있는 빈민은 중요시하고, 자격이 없는 빈민은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음. |
☞ 향후 영향: 개별사회사업, 지역사회사업, 자원봉사활동 등에 영향을 미침
2. 1884년 영국ㅣ인보관(세틀먼트 운동)의 등장
☞ 인보관(세틀먼트)운동 등장 배경
: 기원은 1854년 데니슨 목사가 주축이 된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트 대학의 학생들과 슬럼가 노동자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빈곤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종의 사회이상주의운동을 기점으로 1884년 영국의 런던에서 토인비홀이 최초로 설립되었다. : 이 당시 토인비홀은 COS의 빈곤에 대한 관점, 빈민을 바라보는 태도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고, 이와 반대되는 관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
ㅁ 참고) 1889년 미국, 시카고에서 제임 아담스에 의해 헐 하우스에서도 인보관 운동 시작
☞ 기능
- 주택의 개선 및 공중보건의 향상 - 고용주들에 의한 빈민착취의 방지 및 해결 - 직업기술훈련, 언어훈련, 교육 및 환경개선운동 등 지역사회 주민의 문제해결 역량을 향상시키고, 지역사회의 구조적 측면에서 사회적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 함. |
☞ 개요
- 빈곤 문제를 지역사회의 맥락 즉,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바라보았고, 빈민들 간의 친밀한 관계 중시 - 빈민들의 생활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생활함으로써 빈민들의 환경적 문제를 개선하고, 그들 스스로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독려함. (ex. 빈민 자조조직 결성,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노사문제 논의 상담 및 협의 등) - 이를 통해 지역사회 수준에서 실천 개입을 확산시키는데 영향을 미쳤으나, 후에 국가가 사회복지를 책임지게 되면서 영향력이 약화 |
☞ 향후 영향: 집단사회사업, 사회행동 및 지역사회조직활동의 시초
영국의 구빈법 발전시기에 독일에서도 유사한 봉건질서 속에서
비슷한 구빈제도가 전개되었다.
↓
독일의 구빈제도의 발달
- 함부르크 구빈제도와 엘버펠트 구빈제도
ㅁ 독일의 구빈제도 중 중요한 것은[ 1788년 함부르크의 구빈제도]와 [1852년 엘버펠트의 구빈제도]를 손꼽을 수 있다.
1. 함부르크 구빈제도(1788) - 중아국 설치
ㅁ 교회의 무질서한 자선활동을 배제하고자 독일 함부르크 시에서 도입한 것이다.
ㅁ 무직, 구직자 무리 및 걸인의 해소와 부랑자의 감소 등을 위해 중아국을 설치하고, 시를 각 구로 분할하여 감독관을 두고, 자조의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 시 → 각 구로 분할 → 감독관을 통해 국민들의 자조원조)
ㅁ 초기에는 문전구걸금지, 빈민직업학교와 병원건립, 요보호자 구제, 갱생을 위한 통합적 제도 설치 등의 효과를 보았으나
ㅁ 구호를 받기 위해 몰려드는 인구가 집중되고, 요보호자수가 증대됨에 따라 상담원과 그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활동은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2. 엘버펠트 제도(1852)
- 각 구 명예직 구빈위원(조사 및 상담역)
ㅁ 이는 함부르크 구빈제도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하여 엘버펠트 시가 책택, 시행한 제도이다.
ㅁ 이는 훗날 영국의 자선조직협회(COS,1869)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ㅁ 시를 546개 지구로 구분하되, 각 지구에 약 300명의 주민이 배당되도록 하고,
ㅁ 빈민의 경우 4명 이하가 되도록 구분하였다.
ㅁ 그리고 각 지구마다 명예직 구빈위원을 두어 빈민구제 담당관 역할 및 빈민 상담의 상대역을 하며, 방문조사와 생활실태를 파악토록 했다.
다수파 vs 소수파 보고서(1909) - 다수파보고서가 채택됨
1. 다수파 대 소수파 보고서의 등장배경
영국 자본주의 번성과 함께 달려온 자유방임의 원리는 1873년 대공황과 더불어 새로운 조류와 국면을 맞이하게 되면서, *사회개량주의 사상이 도래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빈곤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다음과 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사회개량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나는 모순이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체제를 변혁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하려는 입장
① 1880년대 ~1890년대, 노동자 세력의 강화 - 당시 힘없고 숙련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조직화됨으로써 뚜렷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는 1885년의 노동자투표권(정치권) 확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90년대에 들어서는 노동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힘을 가지게된 노동자들은 빈곤층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고, 동시에 구빈법의 재고를 요청하게 되었다. |
||
② 온정주의적 인도주의 확산 - 이는 웹(Webb)에 의해 죄의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주로 부유한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들로부터 나왔다. 즉, 명백하고도 점차 증대되는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빈곤에 대해 부유층과 전문직 종사자가 죄의식을 느끼게 됨에 따라 형성되었다. - 이는 앞서 언급한 자선조직협회 운동, 인보관 운동 그리고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개혁을 주장한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 등이 좋은 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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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산업복지에 대한 긍정적 인식 형성 - 즉, 노동자에 대한 생활임금 지급과 구제 또는 교육 및 보건서비스의 제공이 자본가와 산업에 대한 위협이 되기 보다는 경제적 번영의 촉진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형성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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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빈곤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영향 - 부스와 라운트리(Booth & Rowntree)는 1880년대 런던과 요그의 빈민의 생활실태를 극적으로 밝혀내려고 하였다. ㅁ 부스는 런던시민의 1/3이 빈곤상태에 있으며 이들은 신체적 효율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피복이 부족한 상태에 있음을 통계화 했고, 아울러 빈곤의 원인이 도덕적 결함보다는 실업과 노령에 있음을 밝혀냈다. ㅁ 라운트리는 부스의 조사방법을 더욱 세련화시켜 요크빈민의 생활조건을 실증화하였는데, 주민 중 28%는 저임금 상태에 있고, 10%는 신체적 효율성을 유지하기 불가능한 정도의 저임금 상태에 있으며, 18%는 2차적 빈곤, 즉 소비를 보다 합리적으로 한다면 초쇠한의 생활 만큼은 영위할 수 있는 빈민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
→ 위의 빈곤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제 더 이상 빈곤을 개인의 책임이 아닌 사회문제로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전통적 구빈법을 대신할 새로운 변화의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
ㅁ 1905년 왕립조사위원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구빈법 및 실업자들의 제반 구제책에 관한 실태파악을 위해 성립된 것이며, 3년간의 조사 끝에
1909년 다수파 보고서와 소수파 보고서라는 2개의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2, 소수파 보고서 - 국가주도의 보험과 의료서비스, 직업안정책 제시
ㅁ 조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웹부인이 주로 그녀의 남편 시드니 웹과 함께 공동으로 조사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ㅁ 기존 구빈법의 전면폐지와 함께 그 대안으로서 국가주도의 보험과 의료서비스 그리고 직업안정책을 제시했다. ㅁ 자선활동을 국가행정의 보조역할로 보았다. |
3. 다수파 보고서 -구빈행정과 자선기금에 의한 서비스 제공의 자율성 강조
ㅁ 주로 자선조직협회의 영향을 받아 구빈행정과 자선기금에 의한 서비스 제공의 자율성에 강조점을 두었다. |
독일 사회보험의 도입과 발전
- 비스마르크의 3대 사회보험제도 (질병보험, 폐질 및 노령연금, 재해보험) - 사회통제의 목적이 컸음
ㅁ 영국에서 구빈법과 민간차원의 사회복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1880년대 독일에서는 최초의 국가주도 사회보험제도가 등장하였다.
ㅁ 비스마르크 3대 사회보험제도의 등장 배경
- 1866년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으나 국민들의 삶은 어려웠다. 당시 국내에서 노동자계급의 권익향상을 주장하던 사회민주당의 대중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졌다. - 이에 따라 보수적 지주귀족층이었던 융커(Junker)계급과 신흥 부르주아지 등의 지배계급이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 게다가 독일은 잦은 공황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이 매우 불안정하였으므로, 그들에 대한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사회적 안정과 통합, 통제를 위해 3대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였다. |
ㅁ 비스마르크 3대 사회보험제도
- 사회주의자는 노동자를 국가복지의 노예로 만드는 것으로 보아 산재보험 도입을 반대하였다
- 상호부조 조직인 공제조합에서 기원.
① 1883년 질병(건강)보험: 세계최초의 사회보험제도로써 지역, 자영업자, 직장의 조합으로 분리되어 운영(지/자영업/조) ② 1884년 재해(산재)보험: 재원은 자본가 부담 ③ 1889년 폐질 및 노령(연금)보험: 노동자 중심으로 시행 |
ㄴ but !) 비스마르크는 확대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을 억제하는 한편, 노동자계급을 체제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회복지정책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세계대공황과 미국의 사회보장(1935) 도입
ㅁ 미국의 사회보장도입(1935)의 배경
ㅁ 1929년, 세계 대공황은 전세계적 경제적 쇠퇴와 실업자 양상을 가져왔다. ㅁ 그 이전 까지 자유방임적 혹은 자유주의적 이념과 개척자적 생활을 강조하던 미국의 사회복지 원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소극적 -> 적극적 국가로서의 역할 대두) ㅁ 즉, 유례없던 경제사회적 위기 속에서 경쟁적 개인주의는 지탱될 수 없었고, 대량실업에 의한 빈곤문제는 민간이나 지방정부에 의해서는 해결할 수 없었다. ㅁ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연방정부 주도의 영구적인 사회적 프로그램이 필요시되고, 1935년 뉴딜정책과 동일선상에서 케인즈주의 경제원리에 바탕을 둔 긴급구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보장법을 연방정부의 입법으로 제정하였다. |
ㅁ 미국의 사회보장법(1935)
사회보험 | - 노령연금보험: 연방정부 운영 - 실업보험: 주정부 운영 +연방정부 재정 보조 노연 /실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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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조 | - 주정부 관장 + 연방정부의 재정보조 - 노령부조, 맹인원조, 부양 아동원조, 페질원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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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 및 사회복지서비스 |
- 주정부 관장 + 연방정부의 재정보조 - 모성 및 아동보건서비스, 장애아동 서비스, 아동복지 서비스, 직업 재활 및 공중보건서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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